일본미술101-47번째-본문해석-사비에염색매도찻잔
사비에염색매도찻잔(銹絵染付梅図茶碗)
47 器の形はそれほど個性的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穏やかな曲線で器の径かつくられています。そのことによって、絵付けの表現に自由度が増しています。器全体に白化粧掛けがなされて、濃い黒で梅の枝ぶりが描かれています。黒と白の対比は、絵筆の運筆の力強さを引き立たせています。それと同時に、花の淡さが器の表面に遠近(エンキン)をもたらします。また、梅の枝振りが、伸びゆくさまを感じさせる速度感のある線的表現であるのに対して、花は凛として咲いている姿を思わせる面的表現です。動と静が溶け合うように、器に絵付けられています。
47 그릇의 모양은 그렇게 개성적이지는 않습니다. 차분한 곡선으로 그릇의 지름이 만들어져있습니다. 그것에 의해 그림그리기에 자유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릇 전체가 백색으로 이루어져있고, 짙은 검정색으로 매화가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흑과 백의 대비는 붓의 운필의 강한 힘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꽃의 희미함이 그릇의 표면에 원근을 가져다 줍니다. 또, 매화가지모양이 늘어져있는 모습을 느끼게하는 속도감이 있는 선적표현인 것에 비해서, 꽃은 늠름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면적표현입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융합하는 것처럼 그릇에 그려져 있습니다.
器を回してみましょう。左頁に上げたように、書が現れてきます。写真の場合には器の上の書画は、表と裏のように一つの方向からしか鑑賞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しかし、手にとったときの器は、あらゆる方向から見ることができます。乾山の時代には、茶道具では、器に凝らされた意匠だけではなく、茶会での時空間そのものを愉しませることが求められました。器を手元で回しながら見ると、絵が書に場所をゆずり、書はまた絵にその場をゆずりわたすのです。手にとり、掌におさめた感覚、お茶をいただくときに唇に触れる感覚はどうでしょうか。名器となって美術館に収められると、このような鑑賞はできないことが多いですが、イメージを広げて立体を鑑賞してみましょう。
그릇을 돌려봅시다. 왼쪽 페이지에 올린 것처럼 글씨가 나타납니다. 사진의 경우는 그릇위의 서화는 겉과 안처럼 한 방향으로만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손에 쥐었을 때의 그릇은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켄잔 시대에는 다도 도구는 그릇에 담긴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도회에서의 시공간 그 자체를 즐겁게 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릇을 손으로 돌리면서 보면 그림이 글씨에 자리를 잡고, 글씨는 다시 그림에 자리를 내주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손바닥에 담은 감각, 차를 마실 때 입술에 닿는 감각은 어떨까요? 명기가 되어 미술관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 감상은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미지를 넓혀 입체를 감상해 봅시다.
◼︎尾形光琳 · 乾山兄弟の生家は京都有数の呉服商、雁金屋で、彼らは幼少期から華麗な衣装や工芸品の数々に触れて育ちます。文化人と親交の深い環境にあった彼らは、本阿弥光悦をはじめとする人たちの文· 書 · 画 · 陶などにも触れています。兄の光琳は画家として一派をなしました。乾山の作陶は、京焼の大家で仁和寺の門前に窯をひらいた野々村仁清に本格的に陶法を学んではじまります。一六九九年 (元禄 一二)の冬、京の鳴滝に窯をひらきますが、当初の絵付けは、光琳によるものでした。商品としても、渋い乾山の絵よりも明るい光琳の絵の方が好まれたのです。
一七〇四年(宝永元)、光琳が江戸に出ると、乾山は自筆の絵付けの研鑽をつむことになります。乾山自身の作風が芽生えるのも、このころからです。一七一二年(正德二)、再び京都に戻った光琳の影響を受けながら、乾山は意欲的に制作に取り組みます。
◼︎오가타 코린, 오가타 켄잔형제의 생가는 교토의 유수한 포복상, 카리가네야로 그들은 유년기부터 화려한 의상이나 공예품의 여러가지를 가까이하며 자랍니다. 문화인과 친분이 깊은 환경에 있던 그들은 혼아미코에쯔를 비롯한 사람들의 문장·글·그림·도예 등에 대해서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형 코린은 화가로서 일파를 이룩하였습니다. 켄잔의 도공은 쿄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의 총칭)의 대가인 닌나지의 문앞에 가마를 연 노노무라 닌세에게 본격적으로 도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1699년(겐로쿠 12)의 겨울, 수도의 나루타키에 가마를 열었지만, 당초에 그림은 코린의 것이었습니다. 상품의 경우에도 수수한 켄잔의 그림보다도 밝은 코린의 그림을 선호했습니다.
1704년(호에이원년) 코린이 에도에 나가자, 켄잔은 자필의 그림그리기에 깊은 연구를 거듭하게 됩니다. 켄잔 자신의 작풍이 싹트는 것도 이시기부터입니다. 1712년(쇼토쿠 2) 다시 교토로 돌아온 코린의 영향을 받으면서 켄잔은 의욕적으로 제작에 임합니다.
この作品は、その時期の代表作とみられ、乾山の総合的な力量をあらわすものとして位置づけられます。陶だけではなく、詩画賛とも乾山の作です。乾山がもっとも得意とした、べんがらを用いて出る金属銹の色と呉須を用いた青藍色の風合いが生かされています。
이 작품은 그 시기의 대표작으로 보이며 켄잔의 종합적인 역량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릇뿐만 아니라 시화찬도 켄잔의 작품입니다. 켄잔이 가장 자신있었던, 벵가라(황토를 구워 만든 붉은 안료)를 이용해 나오는 금속 녹의 색과 고스(군청색 잿물)를 이용한 청남색의 감촉이 살아있습니다.
印には黒印「尚古」が使われています。「尚古」とは乾山がひらいた鳴滝泉谷の窯に設けた居所「尚古斎」にちなんで使った号で、「いにしえをとうとぶ」という彼の信条がうたわれています。「乾山」の号もこの窯の地理にちなみます。京の都からみて乾(北西)の方角に彼の窯が位置す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はこの地で意欲的に制作をすすめていきました。
「琳派」と呼ばれる大きな流れとその中心には、兄· 光琳がいます。乾山は、光琳の間近にいてその影響を強くうけてはいますが、「白化粧掛け」をはじめとした創意ある手法を用いて独自の作風を築きました。工芸では陶のほか蒔絵にも優れた作品を遺しています。
도장에는 검은색의 인으로 '상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상고’란 켄잔이 열었던 나루타키 이즈미타니의 가마에 마련한 거처 '상고재'의 이름을 따서 사용한 호로, ‘이니시에를 모신다’라는 그의 신조가 나타나 있습니다. '켄잔'의 호도 이 가마의 지리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토에서 볼 때 이누이의(북서쪽) 호각에 그의 가마가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 땅에서 의욕적으로 제작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린파’라고 불리는 큰 흐름과 그 중심에는 형 코린이 있습니다. 켄잔은 코린의 가까이에 있어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는 있지만, '코우케쇼가케'를 비롯한 창의적인 기법을 이용해 독자적인 작풍을 구축했습니다. 공예에서는 그릇 외에도 마키에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 오류,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